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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 교수의 데자뷰2

한알맹 2010. 12. 6. 17:09


狼子野心(낭자야심) 승냥이 새끼는 나면서부터 흉악하다

 

초(楚)나라 영윤(令尹) 자문(子文)은 법을 집행함에 사사로움이 없어 관원과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자문에게는 자량(子良)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역시 초나라 사마(司馬) 관직에 있었다.


자량이 아들을 낳아 월초(越椒)라 이름하고는 한 달이 되자 크게 잔치를 벌였다. 자문도 조카를 보기 위해 동생 집에 이르렀는데 아이를 본 후에 크게 놀라 급히 자량을 찾아 말하였다. “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마치 승
냥이가 울부짖는 것 같다.

속담에 승냥이 새끼는 마음이 산야에 있으니 길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 아이는 후에 우리 가족에게 큰 화를 불러올 상이다. 이를 어떡하면 좋단 말이냐!” 형님의 말에 자량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친아들을 버릴 수도 없었다.

자문은 임종 시에 아들과 측근들을 불러 모아 신신당부하였다. “절대로 월초로 하여금 권력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는 너희는 반드시 이웃나라로 도망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자문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두반(斗般)이 부친의 뒤를 이어 영윤이 되었고, 월초도 사마직을 계승하였다. 월초는 온갖 수단을 써서 왕의 신임을 얻은 후에 두반을 참소하였다.

기원전 626년 마침내 왕은 참언을 믿고 두반의 영윤 지위를 빼앗아 월초에게 넘겼다. 얼마 후 왕이 죽자 월초는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후에 즉시로 두반과 그 측근들을 살해하였다.

<좌전>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비롯된 ‘낭자야심’은 흉악한 본성은 아무리 애써도 고치기 어렵다는 뜻이다. 햇볕 정책 10년의 정성과 노력으로도 흉악한 본성을 전혀 바꾸지 않고 만행을 일삼는 저 북쪽의 승냥이들이야말로 ‘낭자야심’의 전형적인 예이다. 세월이 변하고 강산이 달라져도 도무지 바뀌지 않을 저 승냥이 새끼들을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승냥이 새끼 두 마리를 얻어서 개와 함께 길렀더니 순하게 자라 사람을 잘 따랐다. 어느 날 주인이 낮잠을 자는데 개들이 요란스레 짖어 일어나 보니 아무도 찾아온 사람이 없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 하자 개들이 또 짖어대니 이상하다 여겨 실눈을 뜨고 자는 척 살펴보았더니 이미 다 자란 승냥이들이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개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주인은 바로 승냥이를 때려죽이고 가죽을 벗겼다.

청대 기윤(紀昀)의 <열미초당필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출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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