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 ‘미지왕’ ‘불청객’ ‘에어플레인’….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영화가 개연성 없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엉뚱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관객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는 뻔뻔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의도된 유치함을 마구 발산한다. 이런 경우 키치적 요소가 가미됐다고 한다.
키치(Kitsch)란 대중적 요소 중 저속한 행위를 두루 가르켜 이르는 말이다. 키치에 대한 수많은 이론의 공통점은 바로 ‘드러내기’와 ‘이질적인 만깹?� 조화라는 것이다. 드러내는 행위의 즐거움. 그 유쾌한 자기표현에 대해 알아봤다.
<편집자 주>



저속한 즐거움, 키치

키치라는 단어는 ‘저속한 작품’ ‘싸게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 동사 ‘verkitschen’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하지만 키치의 어원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이중 흥미로운 이론은 부엌(Kitchen)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김진호 경원대 국문학과 교수는 “부엌에서 하나의 재료가 수많은 요리로 재탄생한다”며 “부엌의 이러한 생산적인 요소는 다른 문화와 접목해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키는 키치의 성격과 닮았다”고 말했다. 1860년대 독일 남부에서 처음 사용된 키치라는 말은 ‘천박하며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 등이 마치 훌륭한 진품인 것처럼 스스로를 기만하는 현상’을 뜻한다. 자못 근엄하고 딱딱한 상류층 문화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전역이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중문화의 파급속도도 빨라져 중산층도 예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에 따라 미술품이나 그림을 사들이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키치는 바로 이러한 중산층의 문화욕구를 만족시키는 ‘짝퉁’ 그림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되던 개념이었다.

키치는 매스컴의 급속한 발전이 이뤄진 20세기에 그 범위가 급속히 확장됐다. 대중문화의 거의 모든 영역에 키치적 성향이 가미된 것이다. 김석 서울시립대 환경조각학과 교수는 “산업혁명 이후 저급한 예술이 고급화하는 전략적인 과정을 통해 키치는 일종의 기득권을 획득했다”고 말했다.

키치는 최근 대중들에게 문화의 한 장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키치는 심각하지 않고 가볍게 즐길 수 있다. 기존의 문화보다는 이해하기 쉽다. 이는 대중문화가 가지는 성격과 비슷하다. 따라서 키치는 대중문화와 쉽게 융합되고 빠르게 또 다른 문화에 전파되고 있다. 최정화 설치미술가는 “키치는 서로 다른 문화를 접목시키는 단순한 ‘기술’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문화영역에서 적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모방? 재창조!

키치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은 바로 패러디다. 패러디를 통해 원본의 모방 혹은 창조적 변형을 시도한다. 패러디는 공식적이고 억압적인 것을 비공식적이고 비틀린 방식으로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 특히 ‘잘된’ 패러디는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 절묘하게 현실과 맞물릴 때 탄생한다.
그 중에서도 고가의 티셔츠를 패러디한 것은 기발한 착상을 보여준다. 진짜가 아니지만 얼핏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를 가짜인 줄 알면서 소비한 것이 ‘짝퉁’이라면, 패러디 티셔츠는 가짜임을 드러내며 즐기는 짝퉁이다. 모방의 욕망이 희화화하는 웃음으로 대체된 것이다. 자전거 타는 남자를 수레 끄는 남자로 바꾸고 ‘빈폴(Bean Pole)’을 ‘빈곤(Bean Gone)’으로 바꾼 티셔츠 패러디가 있다. 말 그대로 빈곤한 삶의 무게에 짓눌린 듯한 그림 속 남자가 고가 상품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야유한다. 또한 고가 상품을 가지지 못해 짝퉁을 구매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동시에 보는 이의 시선을 고가 상품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쪽으로 은근슬쩍 옮겨놓는다.
패러디 티셔츠가 사람들에게 각광받았던 이유는 ‘입어도 부끄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가 상품을 사 입을 수 없는 자신의 경제력을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패러디 티셔츠를 입음으로써 자신을 사람들에게 부각시킨다. 게다가 물질만능세태를 비꼬기까지 한다. 이는 주류가 가질 수 없는 자유를 누리는 키치적 정신이다. 윤진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키치의 재창조가 시대를 반영할 때 키치문화는 더욱 빛을 발한다”고 말했다.




부조화 속 조화

지나치게 화려하고 유치한 의상을 입은 연예인을 떠올려보자. 촌스럽고 우습다. 하지만 누구보다 튄다. 키치는 주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을 무작정 드러내는 것에 집중한다. 의도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고영직 문학평론가는 “키치는 화장하지 않은 척 하려고 촌스러운 화장을 한 여인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조소”라며 “여인에게 그런 의도가 있든 없든 우리는 그러한 점을 ‘키치’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이러한 작위성은 우리나라 건축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유럽 특별시를 내세운 한 아파트 분양 광고에서는 진입로에 “신전의 장엄함을 그대로 살린” 파르테논 신전 모양의 문이 서 있고, 트레비·로마노 분수, 오벨리스크 가든으로 이름 붙인 모형물이 단지 내 쉼터에 서 있다. 대한민국 아파트 내에 그리스와 로마와 이집트가 역사를 가로질러 정답게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이다.

이러한 키치적 건축·인테리어 양식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게 된 이유는 70~80년대 급격한 도시화 때문이다. 이종훈 강남대 건축학과 교수는 이런 고급문화의 ‘짬뽕’에 대해 “그동안 우리 사회는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서구사회를 흉내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ㆍ로마시대 건축 양식의 결혼식장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최근 키치의 이질적인 조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움직임도 있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인사동 쌈지길을 예로 들 수 있다. 한옥의 담벼락을 따라 쌈지길에 들어서면 뜬금없이 녹색의 유니콘 모형이 서 있다. 그리고 철근 모형물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 속엔 한옥 건축 양식과 로코코 건축 양식이 공존한다. 쌈지길을 방문한 강은진(29세, 서울거주) 씨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서양의 건축 양식이 한데 모여 있는 점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쌈지길 관계자는 “시민들이 와서 재미를 느낀다면 그야말로 목표 달성”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다면 유치해도 좋아

키치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재미를 유발하는 과정이야 어찌됐든 상관없다. 어려운 것을 기피하고 가벼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환영받는다.
이 때문에 키치는 광고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키치가 가미된 광고는 줄줄이 나열하는 설명보다는 감각적 영상, 단순한 기호를 중시한다. 게다가 재미있다. 때문에 키치 광고는 감각적이고 가벼운 것을 좋아하는 신세대의 취향을 만족시킨다.

또 키치 광고에는 저급한 표현 양식과 즉흥적인 기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한 건강식품 제조업체의 산수유 광고가 키치 광고를 대표한다. 제조업체의 사장이 “산수유, 남자한테 참 좋은데, 남자에게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라고 말한다. 이 직설적인 키치 광고는 화제를 낳았다. 흔히 광고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제품의 고급스러움을 배제하고 다소 민망한 말을 하면서 사람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기존의 광고와는 달리 키치 광고에서는 황당하고 돌출적인 모습의 연출로 소비자의 시선을 이끈다. 얼마 전 방영된 LG텔레콤의 ‘푸콘 가족’ 광고도 키치 광고의 예다. 서양의 가정을 배경으로 백인 마네킹들이 나와 시종일관 미소 지으며 가식적인 대화를 나눈다. 겉보기에는 알록달록한 영상으로 꾸며져 있지만 광고는 백인에 대한 한국인의 무차별적인 호감을 비꼰다. 블랙 코미디식 광고인 것이다. 김진희 웰콤마케팅 팀장은 “키치 광고에서 재현되는 단순한 구성과 싸구려 영상이 최근 대중들에게 선호되고 있다”며 “기존의 키치 광고에 사회적 풍자를 가미하는 광고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윤진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키치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이유에 대해 자극을 원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키치는 사람들이 처음 접했을 때 민망함을 넘어 불쾌할 수도 있을 정도로 가장 원초적인 본성을 자극한다”며 “키치의 이러한 특성이 최근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아 최근 선호된다”고 말했다.




나를 표현하는 유쾌한 방식 

우리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키치의 긍정적인 특징은 ‘부끄러움’이 없는 당당함이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는 “예전에는 키치가 고급문화를 모방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지만 최근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키치는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유쾌한 방식이다. 기성문화를 새롭고 참신하게 ‘재창조’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키치도 우리 생활 전 영역에서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김수진 기자 neunga99@knou.ac.kr
출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보사
http://news.knou.ac.kr/
   


 

Posted by 스마일맨 한알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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